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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시

수로왕비릉

수로왕비릉

수로왕의 왕비가 잠든 곳

백성들을 보살피던 수로왕의 왕비 허황후가 잠들어있는 곳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던 왕비

 

김해 수로왕과 그의 왕비 허황후의 이야기는 김해 유명지들을 여행하다 보면 자주 보게 될 것이다. 그만큼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으며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다양한 관광지들이 수로왕과 허황후와 관계가 많은데 그 곳들 중 하나인 수로왕비릉에 대해 얘기 해볼까 한다. 수로왕비릉에 대해 얘기하기 전 허황후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허왕후는 옛 아유타국의 공주로 16세 때에 배를 타고 와서 수로왕 7년에 왕비가 되었으며, 189년 3월 1일에 수로왕보다 10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고 하며, 수로왕은 두 아들을 허씨의 성을 따르게 하여 지금도 그 후손이 이어져오고 있다. 허황후는 백성들을 아끼는 마음이 컸기에 백성들 역시 그녀를 많이 존경하였다. 허황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백성들은 허황후를 위해 수로왕비릉을 세웠다. 대형의 원형 토분이며 능의 전면에는 장대석(長大石)으로 축대를 쌓고 주위에는 범위를 넓게 잡아 얕은 돌담을 둘렀다.

수로왕비릉
수로왕비릉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봉분 주위에는 아무런 시설이 되어 있지 않다. 능 주위에는 자연석으로 쌓은 얕은 돌담이 방형으로 둘러져 있다. 능의 전면은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으며 중앙에는 상석과 능비가 세워져 있고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지능이라고 두 줄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조선금석총람』에 실려 있다. 무덤에 딸린 부속건물로는 숭보제·외삼문·내삼문·홍살문이 있으며, 보통 평지에 있는 무덤과는 다르게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무덤 앞에는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전하는 파사석탁의 석재가 남아 있다. 세종 28년(1446)에 수로왕릉과 함께 보호구역이 넓혀졌으며, 임진왜란 때 도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 권 제3의 탑상 제4에 보이는 ‘금관성파사석탑’조의 내용에 의하면, 허왕후가 배를 타고 올 때 이 탑을 배에 실어서 풍파를 진정시켰다고 전한다. 

수로왕비릉
수로왕비릉
수로왕비릉

허황후의 죽음을 슬퍼하는 백성들

 

이 능은 수로왕릉에 비해서는 시설이 빈약한 편이나, 수로왕비릉이라고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왔으므로 이것이 수로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한다면 그 내부구조는 토광묘 또는 수혈식 석곽묘일 가능성이 높다. 세종 28년(1446)에 수로왕릉과 함께 보호구역이 넓혀졌으며 『김해읍지』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도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조 25년(1641)에 다시 수축하면서 현재의 능비와 상석 등을 설치하였고, 1972년과 1981년에 건물과 능묘 주변을 보수 정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비록 시설이 빈약한 편이지만 이 내면에는 허황후에 대한 백성들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백성들은 왕비를 잊지 못해 왕비가 처음 배에서 내린 나룻가의 마을을 주포촌(主浦村), 비단 바지를 벗었던 산등성이를 능현(陵峴), 붉은 깃발이 들어왔던 해변을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또 가락국의 질지왕은 452년 왕과 왕비가 혼례를 치른 곳에 왕후사(王后寺)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 주소 : [50912] 경상남도 김해시 가락로190번길 1(구산동)
  • TEL : 055-337-3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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